![1401년 '해주오씨족도'의 투시도(좌측)와 원본(우측). [사진=한국족보유산센터]](https://image.inews24.com/v1/c5a9482f60f16c.jpg)
1401년 족도(族圖)를 마주하다
[아이뉴스24 박정민 기자] 현대 보학에서 우리나라의 계보(系譜)는 13세기 중엽이전(1250년경)부터 작성한 것으로 본다. 당시의 계보는 고려시대의 몇몇 묘지명(墓誌銘), 즉 금석문에 그 일부만이 남아 있다.
14세기에 작성된 현전하는 계보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스승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죽음을 슬퍼하며 1367년에 지은 '이제현 묘지명(李齊賢墓誌銘)'에 들어간 경주이씨(慶州李氏) 계대(系代)가 대표적인 것이다. 이 묘지석은 개성의 고려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목은문고(牧隱文藁)' 권16, '계림부원군시문충이공묘지명(鷄林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으로 수록돼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전하는 계보로는 1401년에 작성된 것으로 고증되는 '해주오씨족도(海州吳氏族圖)'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1장으로 된 이 고문헌은 1401년(태종 1) 오광정·오선경 부자가 작성한 혈통 기록으로,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계보이다. 필사본으로 우리 학술위가 측정한 크기는 기존에 측정된 것보다 조금 큰, 가로 113cm*세로 116cm이다. 족도를 기록한 종이는 기존에 알려진 한 장의 장지(壯紙)가 아니라 책지(冊紙)로 생산된 종이 두 장에 조각 종이를 이어 붙인 닥종이이다.
![1401년 '해주오씨족도'의 투시도(좌측)와 원본(우측). [사진=한국족보유산센터]](https://image.inews24.com/v1/c89295ce8e17f8.jpg)
필자는 지난해 후반기 해주오씨족도를 활자체로 정리한 컴퓨터 출력물을 해주오씨대동종친회 사무실에서 보는 순간, 충격을 받을까 해 숨을 골랐다. 조선 초기의 계보가 역력했기 때문이다.
이후 원본을 볼 수 있기를 종친회에 간절히 요청해, 금년 3월 24일 오전 11시에 경남의 한 지방 도시에서 족도 원본과 해주 오씨 재간보 및 삼간보, 조선 초기의 교지 등등을 단독 감식했다. 1401년 족도와 함께 전래된 교지와 여러 문건, 재간보 등등의 족보를 보면 현전하는 족도의 신뢰성을 입증하여 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9월 중순에는 학술위원장 외 3인(봉성기·송만오·이동국)이 다시 조사했고, 다시 10월 15일과 16일 삼차 조사에서 124점의 유물을 실측하며 사진을 찍었고, 목록을 정리했다.
![1401년 '해주오씨족도'의 투시도(좌측)와 원본(우측). [사진=한국족보유산센터]](https://image.inews24.com/v1/1a80c77023d5b1.jpg)
1401년 족도의 내용
1401년 족도는 특별한 체제에 얽매임 없이 대수(代數)에 따라 계대를 적어 내려간 계보의 초기 형태다. 원 족도는 계보와 발문(跋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표제(標題)는 후대에 첨부된 것이라 큰 의미는 없다. 좌측 하단의 발문이 중요하다.
발문에는 원래 이 족도는 오광정(吳光廷)의 초본을 바탕으로 그의 아들 오선경(吳先敬, 1374~1419)이 완성한 사실이 서술돼 있다. 1401년은 오선경이 1399년에 문과급제한 2년 후인 25세 때이다.
해주오씨족도 원본 투시도와 실측도를 보면 상하좌우 두 번씩 접힌 흔적이 보인다. 세부적으로 보자면 상변과 하변의 크기는 113cm로 같지만, 좌변은 116cm이고 우변은 114.5cm이다. 큰 변의 길이로 볼 때 113×116cm이다. 족도의 아래 부분을 보면, 현재의 족도 밑으로 적어도 현재 족도 길이의 1/4 정도(약 25~26cm)가 떨어져 나간 것으로 여겨진다.
그 떨어져 나간 부분은 후대의 추록(追錄)으로 추정되므로, 없어도 큰 문제는 없다. 현재의 족도 소장자는 상하좌우 한 번씩 접어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족도는 여섯 장의 종이가 이어 붙어져 있다. 가장 큰 부분이 78×53cm이다. 이것은 조선 초기 책지(冊紙)의 크기이다. 원본은 접혀서 손상된 부분의 뒤에 종이를 잇대어 보수(補修)한 흔적이 있고, 그 뒤에 두 장의 얇은 전지로 배접하고 있다. 원 종이를 포함해 3겹의 종이이지만 각 겹의 두께는 대략 0.13㎜로 측정된다.
![1401년 '해주오씨족도'의 투시도(좌측)와 원본(우측). [사진=한국족보유산센터]](https://image.inews24.com/v1/5e284299592203.jpg)
중요한 것은 처음 기록하기 시작한 원고의 특성이 보이며, 표면에서 보사(補寫)한 흔적이 역력하고, 상이한 여러 필제가 보인다. 즉, 이 족도는 오광정의 초본을 바탕으로 아들 오선경이 정리하면서 오기(誤記)것으로 여겨지는 부분도 극히 일부 있다. 하지만 이 족도는 이루어진 현상을 보면 원고(原稿)로 시작한 원본으로 보아야 한다. 즉, 이 족도는 현전하는 우리나라 최고본 계보 자료의 원본이다.
족도는 해주 오씨 상계대를 중심으로 작성되었지만,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혼인 관계에 있었던 장흥 임씨, 경주 김씨, 수원 최씨, 여흥 민씨, 행주 기씨 등 여섯 성씨의 가계가 함께 도식되어 있다. 이러한 계보를 족도의 형식으로 그려서 배치한 모습은 15~17세기 족도식 세보와 계보의 전범(典範)이라 평할 수 있다.
먼저 족도의 상단 중심부는 해주 오씨의 계보로서, 1세 오인유에서 9세까지의 계보가 수록되어 있다. 1세에서 5세까지는 장자 중심으로 단선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자녀 관계를 포괄하여 족도의 취지가 충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6세부터이다. 6세는 곧 처음 족도의 초안(草案)을 만든 오광정 아버지의 항렬에 해당한다. 가계에 따라서는 8세까지만 수록된 경우도 있는데, 족도의 주인공인 오광정·오선경의 가계는 8세인 오선경에 그치고 있다.
![1401년 '해주오씨족도'의 투시도(좌측)와 원본(우측). [사진=한국족보유산센터]](https://image.inews24.com/v1/42e5978b40af94.jpg)
자녀는 출생 순에 따라 수록되어 있어 당시의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아들의 순서는 장자(長子), 2자, 3자, 4자 등으로 매겨져 있고, 딸(사위)은 순서에 따라 기녀(幾女)로 표기된 경우도 있고, 서(壻) 또는 여자(女子)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각 인물의 주기는 극히 소략하여 자녀의 순서, 관직, 이름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현상은 족도의 작성자인 오광정·오선경 부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족도에 따르면 해주 오씨의 시조는 '오인유'이다. 그러나 오선경이 발문에서 '오인유 이전의 세계가 담긴 속적(屬籍)이 우씨(禹氏) 집안에 소장되어 있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두 집안의 혼인 관계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없어 어느 정도 상계의 기록이 우씨 집안에서 가지고 있었는지 전혀 가늠되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오인유는 1634년(인조 12)에 간행된 해주오씨족보 초간 갑술보(甲戌譜)에서부터 시조로 등재돼 있다.
족도는 장흥 임씨를 임원후의 자손들로, 오인유의 증손 오찰(吳札)과 현손 오승(吳昇)과의 관계 속에 수록했다. 김봉모 계열의 경주 김씨는 오승의 처가이다. 최루백 계열의 수원 최씨는 오찰의 처가이며, 여흥 민씨는 민지령의 자손들로서 오찰의 손자 오민정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수록됐다. 기수전 계열의 행주 기씨는 오승과의 관계 속에서 수록됐다. 이러한 혈족 개념이 들어간 해주오씨족도의 계대는 1634년 해주오씨세보 경파, 갑술보의 저본이 된다.
1634년 해주오씨 갑술보, '이존록'을 본뜬 것
1634년 '해주오씨세보(海州吳氏世譜)' 갑술보는 해주오씨 경파(京派)에서 편찬 간행한 초간보이다. 1401년 족도가 필사본이기는 하지만, 1634년 갑술보를 위시한 경파의 모든 족보를 검토해 보면, 경파에서는 족도를 초찬 족보와 같이 여기고 계승해 내려왔다. 반면에 해주오씨 향파(鄕派)의 초간보는 1767년 '정해보'인데, 향파의 정해보는 1401년 족도를 전혀 따르지 않고 있어, 향파는 해주오씨족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문중이라 할 수가 있다.
현재까지 경파와 향파가 각기 주장하는 시조와 족보의 계승성을 보면, 경파는 우리나라의 토성이고, 향파는 중국으로부터의 귀화성으로 주장된다. 그렇다면 현대 보학에서는 경파와 향파는 해주오씨 동성동본이면서 이족(異族)으로 분류할 수 있다. 더군다나 갑술보가 편찬되던 1634년 무렵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가 현실 외교에서 거대한 모순으로 부딪치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기에 해주오씨 경파에서 사대주의에 빠져들지 않고 토성으로 확정한 계대를 유지하며 갑술보를 편찬한 사실은 매우 대단한 일이다.
해주오씨 경파의 1634년 초간 갑술보는 한 면에 6단 10행의 칸을 그리고, 그 칸 안에 이름을 적었다. 이 모양새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1497년에 편찬한 '이존록'의 계도와 같은 모양새인데, 1616년에 나온 '창녕성씨족보' 병진보와 1660년경에 편찬된 '전의이씨족보' 초고 원본이 이런 모양새다.
김종직이 정립한 초기 사림의 도학(道學) 사상이,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 → 백인걸 → 율곡 이이로 이어지고, 임란 전후의 해주 오씨와 창녕 성씨, 전의 이씨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학문을 이어받아 본질적으로 서인 계열의 정체성을 공유했다. 이후 이들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정국에 참여했고, 서인에서 사색당파로 넘어가는 중간 점인 1616년에는 창녕 성씨가, 1634년에는 해주 오씨가, 1660년경에는 전의 이씨가 각기 이존록에 수록한 계보 모양새를 본뜬 족보를 편찬했다.
김종직으로부터 약 120~160여 년 후에 그 후학들이 족보를 편찬하면서 모양새를 본뜨고 있는 것이니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1401년 '해주오씨족도'의 투시도(좌측)와 원본(우측). [사진=한국족보유산센터]](https://image.inews24.com/v1/3f22150a5dbb3e.jpg)
해주오씨족도, 보물로 일괄 지정할 가치가 있다
우리나라의 옛 세보와 족보는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하다. 현전하는 유물을 기준으로, 그 시작점은 1401년 해주오씨족도라 할 수 있다.
현재 국내에 현전하는 15세기의 족도는 3종 정도가 있다. 그 3종 가운데 해주오씨족도가 유일하게 여섯 문중의 계보를 등재하고 있는 가장 방대한 원본이며,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이다. 이 족도는 지난 1987년에 첫 공개 이래 39년 만에 해주오씨대동종친회에서 우리 학술위에 처음으로 특별 공개했다.
한국족보학술위는 검토 과정에서 39년 동안 다른 연구자들이 간과한 사실을 확실하게 바로 잡았다. 첫째로 종이가 장지가 아닌 책지를 이은 것이라는 사실과, 둘째로 조선 후기에 보수한 바 있다는 사실, 셋째로 보수 당시의 여러 필체와 오자가 보인다는 점이다. 넷째로는 소장자의 집에 족도 이외에도 123점 이상의 흥미로운 고문서와 옛 족보가 더 있다는 사실이다. 소장가는 "그동안 찾아온 분들이 아무도 지질을 검토하며 투사도를 찍지 않았고, 집안에 다른 자료가 더 있는지를 묻지 않았다"고 말한다.
학술위는 해주오씨족보 무술보 4권 2책(1718년, 재간보)과 신묘보(1771년, 삼간보) 등 옛 족보와 오유신(吳有信)의 교지(1469년), 오유신의 고신(1473년) 등 124종의 유물을 찾아냈다. 이 가운데 1718년 해주오씨족보 '무술보'는 이번에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야 해주오씨족도의 서지학적인 검토와 필서체의 연구를 통하여 족도의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됐다.
![1401년 '해주오씨족도'의 투시도(좌측)와 원본(우측). [사진=한국족보유산센터]](https://image.inews24.com/v1/e8daa06fd94d94.jpg)
◇이양재 한국족보유산센터 대표는?
이양재 대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애서운동가이자 계보학자·회화사학자다. 1990년 한국애서가클럽 상임이사, 2000년 한국고전문화진흥회 상임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세계고서연맹 정회원, 고려미술연구소 대표, 한국족보학술위 상임위원장, 혜원신윤복기념사업회 상임고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애서운동가 백민 이양재의 옛 족보이야기', '고려불화와 돈황사경을 찾아서', '오원 장승업의 삶과 예술', '제주미래담론', '안견 재조명' 등이 있다.
/박정민 기자(pjm8318@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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