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0일. 미국의 '망중립성 원칙'이 공식 발효됐다. 지난 해 12월 연방통신위원회(FCC)가 기본 원칙을 확정한 지 꼬박 1년 만이다. 하지만 통신사업자들의 '망 차별 금지'를 골자로 하는 '망중립성 원칙'을 둘러싼 공방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버라이즌을 비롯한 통신사들이 법정 공방을 불사할 태세로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11월24일. 이번엔 영국 통신정책을 주관하는 오프콤(Ofcom)이 '망중립성'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오프콤은 이날 ▲트래픽 관리 ▲트래픽 우선제공시 인터넷 사업자에 추가대가 부과 ▲모바일 인터넷전화(mVoIP) 차단 등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오프콤의 이 같은 기조는 시장 자율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유럽통합규제기관(BEREC)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것을 가급적 자제하겠다는 것이다.
통신사업자와 인터넷 업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망중립성 문제를 놓고 미국과 영국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미국, 투명성에 방점 vs EU "트래픽 관리 허용"
망중립성이란 '네트워크 사업자는 모든 콘텐츠를 동등하게 취급하고 어떠한 차별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하지만 간단해 보이는 이 원칙을 명문화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통신사업자와 콘텐츠업체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인터넷 종량제 ▲상호접속 ▲망 개방 같은 이슈들까지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각국 정부들은 망중립성 원칙을 쉽게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자국 산업 상황을 고려하면서도 각종 당사자들의 이해를 잘 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망중립성 이슈를 놓고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표면적으로 보면 미국이 통신사보다는 콘텐츠 업계 보호 쪽에 조금 더 무게가 쏠린 반면, 유럽 국가들은 통신사의 자율 관리를 좀 더 많이 허용하는 편이다.
대표적인 것이 통신사에 트래픽 관리 기능을 부여할 지 여부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이 부분에 대해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다.
실제로 오프콤은 지난 달 통신사들이 트래픽 관리를 하려면 망 제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좋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통신사업자들의 고민에 상당 부분 공감한 것이다. 다만 트래픽 제어와 관련된 주요 사안들을 가입자들이 충분히 인지할 수 있도록 고시해야 할 것을 명시했다.
또한 고품질 서비스를 제공할 경우 인터넷 사업자에게 추가로 과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시했다. 특히 IPTV 등 고화질이 필요한 서비스를 고품질 서비스로 규정하면서 네트워크 효율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이같은 규정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FCC는 원칙적으론 트래픽 관리 기능 보다는 '투명성' 쪽에 더 무게를 두는 입장이다. 물론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도 투명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오프콤이 관리 필요성을 앞세운 것과 달리 미국은 망중립성 제1원칙으로 투명성을 강조하고 있다. 유무선 사업자들은 네트워크 관리 관행을 비롯해 ▲성능 관련 수치 ▲광대역 서비스 이용 조건 등을 공개하도록 한 것이다.
FCC는 투명성 원칙 외에도 ▲차단 금지 ▲이유없는 차별 금지 등을 기본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다. 통신사에 대해 비교적 강력한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미국 통신사들은 FCC의 기본 원칙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 총대를 멘 것이 바로 양대 통신사 중 한 곳인 버라이즌이다. 지난 9월 망중립성 원칙이 "포괄적이면서 불필요한 규제"라면서 FCC를 전격 제소한 것이다.
하지만 FCC 역시 무선부문에 대해선 유보적인 입장이다. 3대 원칙 중 '투명성'만 유무선에 모두 엄격하게 적용하기로 한 것. 두 번째 원칙인 차단금지는 무선 쪽에는 좀 더 느슨하게 적용하기로 했다. 또 차별 금지 조항은 유선에만 적용하며, 무선은 모니터링을 계속하기로 했다.
FCC는 또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VoIP와 IPTV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FCC는 이들을 관리형 서비스로 정의하고 있다. 이 서비스들에 대해선 당장 규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이 서비스가 확대시 인터넷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니터링 하겠다고 밝혔다.
◆지역적 특수성과 밀접한 관련
이처럼 미국과 유럽연합(EU) 국가들이 망중립성 원칙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망중립성 원칙 역시 지역적인 상황을 무시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이런 사정은 미국 역시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지금과 같은 비교적 엄격한 망중립성 원칙을 확정할 수 있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실리콘밸리와 인터넷 업계가 주요 지지 기반인 민주당이 정책 결정의 헤게모니를 잡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임 부시 대통령 시절엔 몇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망중립성 원칙을 확정하는 데 실패했다. 상대적으로 거대 통신사 중심의 지지 기반을 갖고 있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미국과 EU의 입장 차이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잘 아는 것처럼 미국은 '인터넷 탄생지'이다. 그런 만큼 다른 지역에 비해 인터넷 경제가 잘 발달해 있다. 상대적으로 망 보다는 콘텐츠 사업이 더 발달했다.
실제로 경제개발협력기구(OECD)가 지난 해 발표한 매출 기준 세계 10대 인터넷 기업 중 8개가 미국 기업이었다.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기업들은 전 세계 인터넷 지형도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 경제의 지속 성장과 이용자 권익 보호를 위해선 인터넷의 개방성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최근 "일부 민주 국가 중에서도 인터넷을 검열하려는 곳이 있다"고 발언한 것 역시 인터넷 경제가 중심이 된 미국의 특수한 상황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반면 유럽 지역은 인터넷보다는 통신 쪽에 무게가 실린다. 보다폰, BT 같은 통신사들은 단순히 유럽 내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차이나모바일에 추월 당하기 전까지 세계 최대 가입자를 자랑했던 보다폰은 미국 통신업계 강자인 버라이즌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버라이즌의 무선사업 부문인 버라이즌 와이어리스 지분 45%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AT&T와 합병을 놓고 공방을 벌이고 있는 T모바일의 모회사도 독일 기업인 도이치텔레콤이다. 하지만 유럽의 인터넷 기업 중에선 글로벌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주자를 꼽기 힘든 상황이다.
따라서 유럽 입장에선 상대적으로 통신산업 쪽에 좀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자국 산업과 이용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망중립성 원칙은 각국의 특수한 상황이란 프리즘을 통해 바라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부분에 지나치게 집착할 경우엔 '귤을 들여와 탱자를 만드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부 지역선 요금 인상 등 부작용도 대두
망중립성의 핵심 논점은 망에 대해 어느 정도 규제를 하는 것이 소비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겠느냐는 부분이다. 미국이나 유럽 규제 당국이 여러 원칙을 놓고 고심하는 부분도 바로 이 대목이다.
그런 측면에서 망중립성 원칙을 도입한 이후 나타나는 현상들에도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망중립성 원칙을 확정한 미국이나 유럽 시장에서 최초로 망중립성을 법제화한 네덜란드 사례는 특히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올 들어 미국 유력 통신사들은 버라이즌과 AT&T는 데이터 요금을 인상한 뒤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도 폐지했다. FCC가 지난 해 말 망중립성 원칙을 확정한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실제로 버라이즌은 망중립성 원칙 확정 이후 29.99달러였던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를 폐지했다. 대신 30달러(2GB), 50달러(5GB), 80달러(10GB) 등 세 가지 요금제를 도입했다. 사실상 대폭적인 요금 인상을 단행한 것이다.
지난 6월 유럽 최초로 망중립성 법안을 통과시킨 네덜란드 사례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카이프 같은 인터넷 전화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추가 요금 부과 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망중립성 원칙을 확정했다.
그러자 네덜란드 통신사들이 줄어든 수익을 벌충하기 위해 요금을 올리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최대 사업자인 KPN은 망중립성 원칙 통과 이전엔 37.5 유로에 1기가를 제공했다. 하지만 망중립성 법안 통과 이후엔 요금을 35유로로 조정하는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데이터량을 250MB로 크게 줄였다. 사실상 엄청나게 큰 폭의 요금을 인상을 단행한 것이다.
물론 미국이나 네덜란드 통신사들의 요금 인상 조치가 합당한 것이냐는 부분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과연 저 정도로 요금을 욜릴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느냐"는 부분에 대해 좀 더 면밀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선 '소비자들에게 부담을 떠 넘기는' 안이한 조치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이 부분은 규제 당국이 철저하게 감시해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한 발 앞서 요금 대란을 맛본 나라들의 사례에 대해선 충분히 검토할 필요는 있다. 한번쯤은 '망중립성 이후'의 상황에 대해 시뮬레이션 해 볼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한 '망중립성'이란 거대한 조치를 좀 더 부드럽게 안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특별취재팀(안희권 기자 it@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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