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세스는 후진국 수준이다. 발주자의 전문성은 떨어지고 개발 환경은 낙후됐다."
국내 소프트웨어 산업에 대한 비판 중 종종 등장하는 단골메뉴다. 시장은 형성되지 않고 산업은 낙후됐으며 기술 수준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비판은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오히려 국내에는 소프트웨어 개발 전문 인력이 풍부하며, 산업 토대는 이미 갖춰졌다는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
◆국내에는 '아키텍트'가 있다?없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IT인 중 하나인 빌 게이츠의 직함은 마이크로소프트의 '회장님'이나 '사장님'이 아니다. 퇴임 전 그의 공식 직함은 '수석 소프트웨어 아키텍트(Chief Software Architect : CSA)였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 기술자라는 의미다.
'자바의 아버지'라 불리는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제임스 고슬링도 수석부사장 등의 화려한 직함 대신 '아키텍트'라는 명함을 내민다.
국내 대형 오픈마켓 최고기술책임자(CTO)는 "한국에는 이같은 '아키텍트'가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외국에도 젊고 천재적인 개발자들이 많지만 한국 IT 회사 직원들은 정말 젊다. 하지만 한가지 큰 차이가 있다. 외국 IT 업체들은 젊은 직원들 사이에도 일명 'GOD'이라 불리는 존재가 있기 마련인데, 한국에는 그같은 최고 기술자가 기업내에 전혀 없다"고 설명한다.
단순히 기술만 아는 것이 아니라 산업 및 현업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반해 문제를 해결하고 컨설팅한다. 그들의 연륜과 경험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재산이다. 그래서 이들은 신적인 존재로 통한다.
국내 기업에는 이런 존재가 없어 지식의 '축적'이 이뤄지지 않고 따라서 제대로된 컨설팅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아키텍트에 대한 중요성은 정부와 업계도 인지하고 있다. 최고의 아키텍트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소프트웨어기술진흥협회와 한국소프트웨어아키텍트연합회,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 등은 오는 7월 9일 대규모 '아키텍트 대회'를 여는 등 양성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맞춤형 인력 양성이라는 프로그램을 마련, 지난 해 50억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해 최고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한 박사 학위나 국가기술사자격증 취득 등도 지원했다.
그렇다면 국내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빌게이츠나 제임스 고슬링 같은 뛰어난 기술력이나 컨설팅 능력이 부족해서 아키텍트가 되지 못한 것일까.
대답은 'NO'다. 아키텍트가 될 만한 뛰어난 기술과 경험, 컨설팅 능력을 갖춘 인재가 이미 국내에는 적지 않다는 뜻이다.
◇국내 SW개발자 평균근속연수
◆한국형 아키텍트, 가까이에 있다
눈에 보이는 '아키텍트'라는 직군이 형성되지 않았을 뿐, 이미 국내 요소요소에 우리나라는 뛰어난 아키텍트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 정책개발팀 신익호 팀장은 "한국형 아키텍트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국내 주요 IT 서비스 업체에서 십 수년간 현장 개발로 잔뼈가 굵은 노련한 개발자들, 이들이 바로 한국형 아키텍트"라고 강조한다.
그동안 풍부한 기술을 기반으로 정보화 현장에서 직접 뛰며 십수년간 개발에 종사한 이들 엔지니어들은 40대 안팎의 나이가 되면 관리직이나 영업으로 돌아서거나 아예 퇴직을 진지하게 고려해 왔다.
천신만고 끝에 개발해 놓은 완성품도 고객에 불려다니며 이것 저것 시키는대로 바꿔줘야 하는 '험한 일'이기에 젊고 어린 개발자가 차라리 선호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경험있는 개발자들을 구태여 필요로 하지 않고 '소모품' 정도로 여기는 현 상황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을 3D가 아닌 4D 직종 종사자로 만들었다.
더럽고(Dirty, 연이은 야근 철야에 씻지 못해서), 어렵고(Difficult, 고도의 지적 능력을 요해서), 위험(Dangerous,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로 인해 질병을 얻기 쉬워서)하다는 3D 직종의 특성에 D 하나가 더 추가돼서 4D다. 드림리스, 즉 꿈이 없다는 얘기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속담도 무색하게, 고생만 하다가 40줄에 명예롭게(?) 퇴직해야 하기 때문에 꿈이라곤 찾을 수 없다는 의미기도 하다.
◇SW 사업의 주요 초과근무 요인
◇SW 품질 문제 발생의 근원
그러나 어느 소프트웨어 업체나 IT 서비스 업체에 있기 마련인 이들 노련한 개발자들이 바로 한국형 아키텍트이며, 이들이 제 몸값을 받고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와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익호 팀장은 "현업 발주자들이 정보화 프로젝트를 할 때 어떤 요구사항이 있는지는 정보기술과 현업 양쪽에 모두 능통한 아키텍트가 아니면 알 기 힘들다"면서 "이를 알기 위해서는 외국 대학의 MBA 학위가 아니라 실제 개발 환경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경험이 절대적"이라고 설명했다.
한국IT서비스산업협회 이지운 전무 역시 "발주자들은 정보화 전문가가 아니다. 그들은 전공자도 아니며, 심지어 이 일이 본업도 아니다. 그들이 전문화 돼야 할 이유가 없다"고 강한 목소리를 냈다.
이 전무는 "발주자가 정보화 사업에 대해 전문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의미는 그들이 직접 아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완성도 높은 정보화 사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라면서 "그러기 위해선 현재 산업과 기술에 정통한 국내 엔지니어들의 도움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무늬만 컨설팅, 패션쇼의 모델옷 같아
국내에 아키텍트가 없다는 현실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최고 기술자가 되기 위해 국가공인자격증을 취득하거나 비싼 비용을 내고 박사 학위를 따야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업체마다 이름없이 빛도 없이 '나이먹은 개발자' 취급을 받고 있는 진정한 전문가들에게 빛을 보여줘야 비로소 한국형 아키텍트가 양성된다.
현재 이같은 경력 십수년 이상의 '현업-기술 양방향 통달자'는 국내 소프트웨어 업체 및 IT 서비스 업체에도 적지 않은 수가 포진하고 있다.
국내 주요 IT서비스업체 3사만 하더라도 이 조건에 해당하는 소위 '비즈니스 어시스턴트(BA)'가 8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SDS 관계자는 "BA들이야 말로 고객사의 모든 업무와 개발 과정에 정통한 분들이면서 가장 고객 입맛에 맞는 컨설팅을 해주는 직무"라고 소개한다.
◇SW 기술자 노임단가 및 기술자 분포
그러나 삼성SDS를 비롯한 IT 서비스업체에서 BA들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다. 이 BA같은 양방향 전문가들이 제대로된 정보화 컨설팅을 할 수 있는 인력이라는 사실을 인정받아야 함에도 불구,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외국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취득하고 근사한 프리젠테이션을 만드는 '컨설턴트'들이 정보화 컨설팅을 하곤 하지만, 실제 이들의 컨설팅은 변변한 제안요청서 하나 도출하지 못한다"고 꼬집는다.
한 IT 서비스 업체 임원은 "현 정보화 컨설팅은 패션쇼에 등장하는 모델의 옷"이라고 거침없이 지적했다.
패션쇼에서 모델이 입고 나오는 옷은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일상 생활에서 소화하기에는 다소 거리가 먼, '관람용' 옷이 대부분이다.
현업에 대해 제대로된 요구분석 없이 현재 수행되고 있는 정보화 컨설팅도 이같은 맥락이라는 것이 이 임원의 지적이다.
따라서 현업에 대한 이해가 높은 개발자들이 완성도 높은 컨설팅을 해줄 수 있는 '아키텍트'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임원은 강조한다. 그러면 개발자들의 4D 현상도 궁극적으로는 해결될 수 있다는 것.
한국IT서비스산업협회 채효근 실장은 "미국의 경우 전문적인 정보화컨설팅 에이전시가 따로 있다.발주자들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정보화 사업을 진행한다"며 "이 컨설팅 에이전시들은 대부분 십수년의 경력을 가진 소프트웨어 아키텍트들로 이뤄져 있으며, 미국의 젊은 개발자들은 이 아키텍트나 컨설턴트가 되기를 꿈꾼다"고 설명했다.
강은성기자 esther@inews24.com 서소정기자 ssj6@inews24.com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