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전 세계 주요 국가에서 '위드 코로나(단계적 일상 회복)' 도입에 속속 나서자 재계 총수들의 해외 출장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훼손, 원자재값 상승 등으로 불안한 경영 환경이 지속되는 가운데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주도권'을 뺏길 것이란 위기감에서다.
25일 재계에 따르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주요 그룹 총수들이 미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현장 경영을 펼친다. 미래 먹거리로 부상 중인 반도체와 전기자동차, 배터리 등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다.
이 부회장은 다음달께 미국 출장길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 가석방된 이후 이 부회장이 미국에 갈 것이란 관측은 꾸준히 제기됐지만, 그동안 삼성물산 합병 의혹, 프로포폴 등과 관련된 재판 일정들이 연이어 진행돼 실현되지 않았다. 또 시민단체 등에서 제기하는 취업제한 논란도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미국 내 신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부지 선정과 관련해 최종 결정이 임박한 만큼, 이번엔 이 부회장이 다음달 5일께 미국 출장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이 부회장이 해외 출장에 나서게 되면 지난해 10월 이후 처음이다.
앞서 삼성전자는 약 170억 달러(약 20조원)를 투자해 미국 파운드리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텍사스 오스틴과 테일러 등 2곳에서 부지 선정을 두고 저울질 해 왔다. 올 초 갑작스런 수감 생활을 하게 된 이 부회장의 부재로 반년 가까이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상태다.
재계에선 이 부회장이 이번 미국 출장에서 공장 부지 선정과 건설에 미국 정부의 지원이 필수적인 만큼 직접 관계자들을 만나 관련 작업을 마무리할 것으로 전망했다. 또 오스틴 공장 주변에 자리 잡은 엔비디아, 퀄컴 등 고객사와 회동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관측했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삼성 고위 임원들이 해외 출장 때 이용해 온 항공편이 미국 페어뱅크스 국제공항으로 이동한 것으로 전해 들었다"며 "이 지역은 재계가 이용하는 항공편을 수리하거나 점검하기 위한 목적으로 종종 운항하는 곳으로, 이 부회장의 미국행을 앞두고 사전 점검하기 위해 비행한 것이 아니겠냐는 추측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 파운드리 공장 투자 결정이 너무 늦어지고 있다는 지적과 미국 정부의 반도체 공급망 압박이 가중되고 있어 이 부회장이 더 이상 해외 출장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일 것"이라며 "부친 이건희 회장의 별세 1주년 추모 행사를 이날 치른 뒤 미국 출장을 계기로 해외 경영에 본격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정의선 회장은 이미 미국 출장 일정을 마친 뒤 전용기를 타고 곧바로 인도네시아로 향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리는 JI엑스포 전기차(EV) 로드맵 발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미국에선 로스앤젤레스(LA) 현대차 미국 판매법인과 앨라배마 현대차 공장 등을 방문하며 현지 판매 전략을 점검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현대차는 지난 5월 "2025년까지 전기차 현지 생산 등 미국 시장에 약 8조원 이상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인도네시아에선 이날 JI엑스포 행사에 참석해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만나 현지 전기차 생태계 조성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현대차의 전기차 아이오닉과 제네시스 G80 전동화 차량에 올라타 정 회장에게 직접 질문을 던지며 큰 관심을 드러냈다.
인도네시아는 아세안 국가 중 경제·인구규모가 가장 크고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니켈·망간·코발트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최근에는 자국을 2030년까지 '전기차 산업 허브'로 육성하겠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이와 별개로 현대차그룹은 아세안 전기차 시장 공략을 위해 LG에너지솔루션과 인도네시아 카라왕 지역에 33만㎡ 규모의 배터리 합작공장을 건설 중이다.
정 회장은 "인도네시아 정부의 관심과 지원으로 완성차 공장 건설이 순조롭게 준비돼 내년 전기차 양산을 앞두고 있다"며 "현지 파트너사와 협력, 기술 육성 지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인도네시아와 함께 성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기차 생태계를 활성화하고, 미래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도록 충전 인프라 개발과 폐배터리 활용 기술 분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7월에 이어 이달 말께 미국에 또 방문해 배터리·반도체 등 현지 사업 재정비에 나선다. 이날 김부겸 국무총리와 만나 청년 일자리 확대 방안을 논의한 이후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최 회장은 지난 7월 미국 출장에선 현지 투자 거점인 SK워싱턴 지사와 SK하이닉스 사업장을 각각 방문하고 사업 및 투자 현황을 집중 보고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출장에선 미국 2위 완성차업체인 포드자동차와의 배터리 합작 사업을 직접 챙길 것으로 보인다. 배터리 합작사 공장이 들어설 테네시주와 켄터키주를 방문하고 포드 사장단과도 회동할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SK이노베이션에서 분사한 배터리 사업 독립법인 SK온은 포드와 배터리 합작사 '블루오벌SK'를 설립하고 114억 달러(약 13조4천300억원) 규모의 투자를 결정했다.
또 최 회장은 SK하이닉스가 실리콘밸리에 건립을 추진 중인 연구개발센터 진행 현황도 살펴볼 예정이다. SK는 지난 5월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약 10억 달러(약 1조1천780억원)를 투자해 인공지능(AI), 낸드솔루션 등 신성장분야 혁신을 위한 반도체 연구소를 건립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더불어 일각에선 최 회장이 바이든 행정부가 요구한 반도체 관련 정보 제출 대상에 SK하이닉스도 포함된 만큼 이에 직접 대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외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 7월 일본으로 출장을 떠나 약 두 달간 머물며 현지 사업을 챙겼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도 최근 미국 출장길에 나선 것을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직접 알려 눈길을 끌었다. 유통업계에선 이마트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현지 슈퍼마켓 사업 진출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 부회장이 미국 사업 확장을 위해 현지 관계자들을 만났을 것으로 추측했다. 정 부회장은 올해 2월에도 현지에 오픈할 예정인 'PK마켓(가칭)' 등 여러 사업을 점검하기 위해 미국 출장에 나선 바 있다.
다만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이달 말부터 한 달간 이어지는 사업보고회 등 일정으로 인해 당분간 해외 출장길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989년부터 이어져온 LG그룹 사업보고회는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으나, 지난해부터 하반기 한 차례로 줄었다. 구 회장은 사업보고회 기간 동안 각 계열사 최고경영진과 만나 올해 실적을 점검하고 내년 사업계획과 경영전략을 확정한다.
재계 관계자는 "그간 코로나19 확산으로 주요 안건들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현지 사업에 차질을 빚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에 재계 총수들이 '위드 코로나' 분위기가 조성되자 미루고 미뤘던 현지 사업장 방문을 재개해 현장 경영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반도체, 배터리 등을 중심으로 글로벌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관련 기업 총수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며 "총수들이 나서는 것은 다른 국가나 경쟁사에 주도권을 뺏기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장유미 기자(sweet@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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